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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

미국 역사 정리(3) - 신생 국가 시절 / 성장과 갈등

by 네잇_ 2020. 3. 30.

미국 역사 정리(3) - 신생 국가 시절 / 성장과 갈등

신생 국가 (1776 - 1789)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미국 독립(American Revolution)은 18세기 중엽에 13개 식민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을 수립한 것을 말한다. 흔히 미국 혁명이라고도 한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 13개 식민지는 영국 제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을 벌였다. 미국 독립선언은 1776년 발표되었으며 전쟁에서 승리를 확고히 한 것은 1781년이었다.

 

식민지 과세

7년 전쟁의 일환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난 1763년, 대영 제국은 무려 1억 3000만 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한 해 이자만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액수로 제국 유지비용의 상당액을 《인지세법》(1765년), 《타운젠드법》(1767년) 등 각종 과세를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려고 한 것이 미국 독립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대영 제국의 결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의 참여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3개 식민지는 “대표의 참여 없는 세금 부담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대륙 회의
애국자라 불리던 독립파 인사들이 서신 교환을 통하여 영국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회의 구성에 합의하였고 이들은 1774년 1차 대륙회의, 1775년 제2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1775년 보스턴 차 사건이후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제 2차 대륙회의에 벤자민 프랭클린,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 초안을 제출하고 있다. 미국 내의 왕당파가 인구의 30%에 이르렀음에도 독립파들은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80%가 넘는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대영 제국은 일부 해안 지역만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은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을 수립하였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 내 13개 영국 식민지 대표들이 미국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해 7월 2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탈퇴할 것을 결의, 7월 3일 신문에 발표, 7월 4일 대륙회의에서 승인, 7월 8일 독립기념관의 발코니에서 승인 내용을 공식 선언하였다. 또한 선언서의 공식 제목은 '아메리카 합중국 13개 주의 만장일치 선언'(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맨하튼 흑백사진

독립 전쟁

워싱턴을 총 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은 독립 전쟁 초기에 영국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후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후 워싱턴의 지구전 전략과 프랑스 왕국 해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세는 독립군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미국의 대륙군은 1776년 ‘트렌턴 전투’와 1777년 ‘새러토가 전투’, 그리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영 제국의 군대에 승리하였다.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미국과 영국 제국은 1783년 9월 3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성장과 갈등(1789-1849)

 

건국 초기
1790년 수도가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옮겨졌다. 남부 주민들 중에는 수도가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 미국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주 경계에 있는 포토맥 강 유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801년에 새로운 수도가 완공되어, 정부 기관이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새로운 수도가 완성되기 직전 1799년에 사망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여 워싱턴 시로 이름지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1783년, 독립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스페인령의 플로리다 반도 일대를 제외한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상업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방과 뉴올리언스를 구입하였다. 이것은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불리며 이 매입으로 인해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증가하였고 미국은 점점 하나의 국가로서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물론 이는 미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나폴레옹의 정치적인 계산과 영토를 넓히려는 미국의 욕심에 따른 것이다.

 

위스키 반란

서부의 개척자들이 주류에 대한 연방세 부과에 항의하면서, 1794년의 위스키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방 정부 성립 후 최초의 엄중한 시련이 되었다. 워싱턴은 주 민병대를 소집해서 직접 군대를 이끌었고, 반란군들을 완전히 분쇄시키며 공권력을 단호하게 만들었다.[5]

 

 

미국 샌드 스톤

유사 전쟁(미국 vs 프랑스)

연방주의자였던 존 애덤스는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토머스 제퍼슨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사이 미국의 독립 전쟁을 도와주었던 프랑스 왕국은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전복되었고, 새로운 프랑스 총재정부(1795-1799)는 1797년 XYZ 사건 등으로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프랑스와의 전쟁 조짐이 보였다. 연방주의자는 이 기회를 《외국인과 치안법》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을 수장으로 한 대규모 군대를 조성하고, 프랑스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공화당을 침묵시키려는 시도로 이용했다. 그러나 애덤스가 1798년 ‘유사전쟁’을 끝내게 되는 성공적인 평화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성공하자, 연방주의자들은 분열되어버렸다.[7][8]

 

미영 전쟁 (1812-1815)

루이지애나 인수 몇 주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미국은 유럽에 농산물 수출을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에 의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미국은 중립적 태도를 취했고, 양 진영 및 양 진영이 가지고 있는 카리브 해안의 식민지에 농산물과 원자재를 수출했다. 양국 모두 이익이 될 때는 무역을 허용했고, 불이익이 될 때는 무역을 거절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가 패하자, 영국은 프랑스의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 또한 영국은 미국 무역 정책에 대해서도 느슨한 해상 봉쇄를 실시하고 보복을 가해왔다.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 농산물 수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국 의회와 제퍼슨 대통령은 영국의 해상 봉쇄 해제를 노리고, 1807년에 외국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영국은 다른 나라로 농산물 수입선을 전환했다. 미국의 농산물 수출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1812년, 영국이 미시시피 강 서부와 캐나다 원주민을 지원하는 것을 구실로, 남부와 서부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었고, 독립전쟁 종전 후 29년만에 다시 미영 전쟁(또는 1812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부와 서부의 이주 백인들은 인디언의 땅을 얻는 것이나 농산물 수출 확대를 기대하며 전쟁을 열심히 지원했다. 그것에 대해 북부 연방주의자들은 전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초기의 승리로 그들의 반전론은 힘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미국에 있어서 괴로운 싸움으로 끌려갔고, 1815년 벨기에에서 체결된 헨트 조약으로 정전을 하게 된다. 이 조약은 미영의 영토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게 하였다. 이 미영 전쟁 중에 유럽과의 관계가 끊기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고립되면서 미국인으로서의 정신적 자립을 재촉했다. 이에 따라 국수주의가 높아져 보호 관세를 도모하고 자국 내의 공업을 발전시켰다.

 

서부 개척 시대

처음에는 13개주로 시작했던 미국은 여러 정책들과 밀려오는 이민자들을 기반으로 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팽창해 나간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라고 불린다. 후기성도들, 국외로부터 들어오는 이민자들, 골드러시의 영향으로 금광 채굴에 관심이 있는 이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부로 대거 이주하였다. 당시 백인들은 담배 농사에 필요한 새로운 농토를 찾아서 서부로 이동했는데, 이러한 백인들의 서부 이동은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여 인디언들과 미국 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 강제 수용(1830년), 세 차례에 걸친 인디언 학살(약 300만 명 학살, 어린이와 여성 포함), 인디언들의 식량 동물인 들소 학살 등 인디언 말살 정책을 통하여 그들의 토지를 강탈하였다. 물론 인디언들은 그들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저항했으나, 백인들의 화력을 이길 수는 없었으며 인디언들의 참정권을 인정한 1930년대까지 차별 받으면서 살았다.

 

 

 

 

미국 캐년

 

미국은 영토 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자연히 북부와 남부의 주산업은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북부는 산업, 공업, 어업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해 나갔고, 토지가 비옥한 남부는 농업, 플랜테이션 등을 통해 발전해 나갔다. 이에 따라, 남부인들은 자신들의 농업을 뒷받침해줄 노예제를 원했으며, 북부인들은 인간 평등이라는 원칙하에 노예제 폐지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 갈등이 깊어지면서 결국에는 남북 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미국 멕시코 전쟁

미국인은 나라의 국경을 넘어 북아메리카 특히 오리건, 캘리포니아 및 텍사스에서 확대해 나갈 권리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184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팽창주의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났다.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텍사스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멕시코는 이 땅을 자국의 영토로 여겼다. 그러나 1845년 텍사스 합병으로 텍사스가 미국의 주가 되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46년 5월 의회는 멕시코에 선전 포고했다. 멕시코는 미군의 대포 공격에 견디지 못했고, 보급품의 고갈뿐 아니라 지휘 계통의 분열로 패배를 당했다.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하는 텍사스주와 캘리포니아주와 뉴멕시코주를 받았다. 이후 13년간 멕시코에서 획득한 영토는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의 확장을 둘러싼 당파적 긴장 관계를 좌우하는 것으로서 정쟁의 초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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